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홈
사이트맵
English
국립소록도병원
검색어
검색
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너비 1180px 이상
너비 768px - 1179px
너비 767px 이하
보건복지부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로고
관람정보
관람 안내
전시실 안내
전시해설 안내
전시
상설전시
기획전시
특별전시
온라인전시관
디지털자료실
소장유물
역사자료
소장자료
국가유산
수어영상
소식 · 참여
박물관 소식
자료수집 안내
열람 · 복제 안내
박물관 소개
소개
연혁
시설안내
홍보동영상
통합검색
검색어
검색
통합검색닫기
전체메뉴
전체메뉴
홈
보건복지부
English
국립소록도병원
관람정보
관람 안내
전시실 안내
전시해설 안내
전시
상설전시
기획전시
특별전시
온라인전시관
디지털자료실
소장유물
역사자료
1930년 이전
1930 ~ 1950
1951 ~ 1980
1980 이후
소장자료
연보
발간물
소록도문학관
국가유산
수어영상
소식 · 참여
박물관 소식
자료수집 안내
열람 · 복제 안내
박물관 소개
소개
연혁
시설안내
홍보동영상
이용안내
사이트맵
전체메뉴닫기
디지털자료실
소장유물
역사자료
1930년 이전
1930 ~ 1950
1951 ~ 1980
1980 이후
소장자료
연보
발간물
소록도문학관
국가유산
수어영상
홈
>
디지털자료실
>
수어영상
>
국립소록도병원 홍보영상
국립소록도병원 홍보영상
본문시작
제작 냄비
제작 국자
단추끼우개
개인치료용 칼
솥들개
기와틀
연탄형틀
시멘트블록형틀
고흥 소록도 4.6사건 진정서와 성명서
청진기
해부학책
의학강습소 수료증
대운동회
벽돌
감금실
명주 저고리 바지
80년사 초고
보리피리 시비
사랑의 동물원
벽돌공장 가마터
구라탑
이춘상 6.20의거 기념비
소록도 문예지
자혜의원
병사성당
검시실
만령당
열녀 박지지 삶과 사랑
국립소록도병원 홍보영상
전라남도 고흥의 푸른 황톳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다 건너 작은 섬 소록도와 마주하게 됩니다. 국내 유일의 한센병 전문병원이 있는 소록도, 한센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정든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소록도에 와야만 했습니다. 1916년 조선총독부는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와 요양을 목적으로 소록도의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해 한센병 전문병원인 자혜의원을 설립합니다. 하지만 치료는 구실일 뿐, 사실상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이주와 격리 조치였습니다. 1933년 소록도로 부임해온 스오 원장은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 갱생원으로 바꾸고 3,000명의 한센인들을 수용하겠다 호언장담합니다. 이 환자들을 수용할 건물을 짓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가 펼쳐지는데요 동원된 인부들은 다름 아닌 소록도의 한센인들이었습니다. 소록도 곳곳에서 펼쳐진 건물 신축공사와 도로 확장공사 골지 운반 등의 한센인들이 동원됐고, 아픈 환자들은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는 부족한 병원 재정을 충당한다는 명목하에 원생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합니다. 손발이 불편한 한센인들에게 연간 30만 장에 달하는 가마니를 짜게 하고, 거대한 벽돌 공장을 세워 벽돌을 굽게 합니다. 그 와중에도 소록도 확장 공사는 계속돼 중노동에 시달리다 못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소록도를 탈출하기에 이릅니다.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니었던 소록도에서의 삶. 배고픔과 중노동에 시달리던 한센인들은 시름시름 앓아갔고, 치료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습니다. 아픈 환자를 돕던 젊은 청년 이동은 일터에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인 사토 수간호장에게 갖은 폭행을 당하고 결국 감금실에 갇혔습니다. 감금실에 수감된 한센인들은 무조건 단종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단종 수술을 받을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습니다. '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계속되는 핍박 속에 1939년 12월, 스오 원장은 소록도에 공원을 조성하겠다 발표합니다. 아시아 각지에서 조달된 수백 그루의 나무가 소록도로 공수되고, 환자들은 맨손으로 나무와 돌들을 옮겼습니다. 아름다운 소나무와 향나무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지금의 중앙공원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눈물의 공원이었습니다. 특히 공원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바위는 한센인들에게 유독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원을 장식할 거대한 바위는 수십 명의 장정이 들어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바위를 옮길 때면 사토 수간호장은 바위 위에 올라 사람들을 호령했죠. 바위를 옮기다가 사고가 나기 일쑤였고 게으름을 부리면 바로 채찍이 날아왔습니다. '옮겨도 죽고, 옮기지 않아도 죽는다'해서 한센인들은 이 바위를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불렀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남북 분단과 6.25 동란을 거치며 역사적 격변기를 지나왔지만, 소록도의 가슴 아픈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한센인들과 일반인은 철저히 분리 수용됐고, 한센인 부모들은 아이가 있어도 제 손으로 키울 수 없었습니다. 보육 시설을 만들어 아이를 따로 키우고,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만이 허락됐습니다. 면회 날이 되면 자식을 눈앞에 두고도 안아보지 못하는 부모들의 탄식이 소나무 숲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탄식의 장소 '수탄장'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던 1962년 정부는 소록도의 한센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약속합니다. 오마도와 오동도를 연결해 뚝을 쌓아 새로운 간척지를 만들면 그 땅을 한센인들에게 무상으로 분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것입니다. 소록도가 아닌 섬 바깥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센인들은 팔을 걷어붙였습니다. 피땀 흘려 간척한 땅은 1,500세대가 2,500여 톤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드넓은 땅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한센인들이 2년 넘게 간척공사에 매달렸지만, 사업권이 이전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반대에 부딪혔고, 천해타르에 달하는 비옥한 간척지는 결국 1988년 한센인들이 아닌 지역 주민들에게 분양됐습니다. 소록도 100년 한센병은 알약 하나로 완치가 가능한 병이 되었고, 전염의 위험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100년의 세월에도 사라지지 않은 한센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 그 벽을 깨는 것이 우리들의 몫입니다.
본문종료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