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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박물관 홍보영상
ZONE.01 한센병 Hansen's Disease 한센병은 나균 감염에 의해 발생하는 피부질환입니다. 과거에는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나 현재는 다제요법(MDT)을 통해 완치가 가능하며 감염의 우려도 사라졌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센병에 관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으며, 구한말 선교사들이 각지에 요양소를 세우고 1916년 소록도에 자혜의원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한센병 극복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한센병 치료제들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국내에서 한센병은 완치되기 시작하였고, 오늘날에는 환자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ZONE.02 인권 HUMAN Rights 소록도에서는 그동안 수많은 인권 침해가 있었습니다. 굶주림과 노역, 감금과 학대, 단종과 낙태, 그리고 학살까지 참혹한 인권 유린이 일제강점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러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소록도의 인권 유린의 역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슴 아픈 이야기이며, 동시에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오늘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습니다. ZONE.03 전이공간 Space Transition 잠시 멈추어 서서 소록도의 새벽을 깨우는 소리를 들어보세요. 무정한 파도소리는 오늘도 모래를 닦고 또 닦아내지만 소록도의 한을 씻어내지는 못 합니다. 매일 새벽 마을에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소록도 사람들은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분들은 지팡이를 의지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들어보세요. ZONE.05 삶 Life 소록도 사람들은 질병과 배고픔, 노역과 소외 속에서 모진 세월을 겪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운 삶을 가꾸어 나갔습니다. 이곳에 전시된 유물들에는 소록도 사람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 삶에 대한 의지, 자활에 대한 노력, 그리고 종교와 예술을 통한 아픔의 승화가 담겨있습니다. 어려움 속에 꽃피웠던 소록도의 삶을 만나보세요. ZONE.05 국립소록도 병원 SOROKDO NATIONAL HOSPITAL 1916년 소록도 자혜의원으로 시작한 국립소록도병원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센인의 동반자로서 한센병 극복의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소록도의 역사에는 아픔이 많았지만 국립소록도병원은 언제나 한센병 극복을 위한 중심점으로서 노력을 다해왔습니다. 2016년 개원 100주년을 맞은 국립소록도병원의 발자취를 소개합니다. ZONE.06 친구들 Friends 소록도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위해 헌신한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봉사자들을 기념하는 작은방에는 40여 년간 소록도에 머물며 평생을 한센병 환자 치료에 바치신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편지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영상을 통해서 위문과 공연을 통해 소록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던 순간들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전자 방명록을 통해 이제 여러분도 한센인의 친구가 되어주세요.
아픈 100년의 역사 동행하는 소록도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영상 눈물의 땅, 소록도 100년- 1부작 1. 평화로운 섬, 소록도 # 헬리캠/ 녹동항, 소록대교 부감 소록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전라남도 고흥에 위치한 작은 섬 소록도 고흥반도의 끝자락, 배로는 10분. 소록대교로는 5분도 안 걸리는 지척에 잊지 못할 섬, 소록도가 있다. - 중앙공원 나무들 s.k / 파도치는 바다 / 관람객들 하늘 높이 솟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푸른 파도가 평화로이 오가는 소록도의 풍광을 보기 위해 외지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섬이지만 - 출입금지 표지판 한때 소록도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으로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 속에서 말 못할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 공원에서 안내원 사람들에게 설명 “이 중앙공원이 일제가 한센병 환자 6만 명을 강제 동원해 조성한 공원입니다. 환자들의 피와 땀, 한이 서린 공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나무들과 기암괴석 아시아 각지에서 온 100여종의 나무와 거대한 바위들이 만들어낸 수려한 풍광. 이 공원을 만든 이들은 다름 아닌 한센인들이었다. - 잘린 손, 일그러진 얼굴 사진들 마디마디 잘린 손가락과 내려앉은 코. 흉측한 외모 때문에 문둥이라 불리던 한센인들. 제대로 된 치료법도 없던 시절, 천형이라 불리던 한센병보다 더 괴로운 것은 세상의 냉대와 핍박이었다. - 소록도 해부실 소록도에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한센인들의 수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 해부실에서 안내원 설명하고 “한센인은 사망하면 무조건 해부를 합니다. 그래서 한센인은 총 3번 죽는다고 하는데요. 한센병에 걸렸을 때 한번, 해부를 해서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에 화장까지 총 3번을 죽는다고 합니다. “ “그래서 환자들 소원이 일요일에 죽는 거였다고 합니다. 일요일은 해부를 안 했으니까요.” - 빈 해부대 보고 코가 녹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려나가는 고통 속에서 마지막 가는 길인 죽음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은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했을까? 2. 자혜의원, 소록도 슬픈 역사의 시작 # 자혜의원 설립 1916년 ‘나환자 낙원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조선총독부는 소록도의 집과 땅을 강제로 매수, 소록도 자혜의원을 설립한다. - 환자들 사진 치료는 구실일 뿐, 사실상 한센인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이주와 격리조치. - 수감실 전국 각지에서 소록도로 끌려온 한센인들에게 낙원은 없었다. # 수호 원장 사진 / 작업하는 사진 1933년, 4대 원장으로 취임한 수호(수호 마사히데周防正秀)는 소록도 자혜의원을 소록도갱생원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3천명의 나환자들을 수용하겠다. 호언장담한다. - 벽돌 공장 사진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연간 140만장의 벽돌을 생산하는 공장을 완공하고 손발이 불편한 원생들에게 벽돌을 만들게 했다. - 도로 확장 / 병사 건설 갱생원의 대대적인 확장 공사에 동원돼 도로를 내고 자재하역, 골재운반 등, 새 병사를 짓는 공사에까지 동원됐던 한센인들 - 중일전쟁 자료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갈수록 피폐해진 환경 속에도 진행된 확장공사로 원생들은 굶주림과 싸워가며 매일 강제노역에 시달려야했다. - 갱생원 찾은 조선총독 미나미 당시 한센인들은 벽돌 뿐 아니라 연간 30만장의 가마니와 1500장의 토끼가죽, 3만포의 숯을 제조하는 등 전쟁 군수물자 생산에 동원됐다. - 선착장 공사 그 와중에도 소록도 확장공사는 계속됐다.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나환자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동원되어 600미터가 넘는 호안도로를 만들고 1톤이 넘는 바위를 옮기며 120만에 선착장을 만들기도 했다. - 채찍질 / 바다로 도망가고(샌드아트) 힘든 노동을 못 이겨 바다를 탈출한 환자들이 바다에 빠져죽거나 다시 잡혀와 감금소에 갇히는 일도 부지기수. 소록도는 한센인의 낙원이 아니라 지옥이 되고 있었다. 3. 항거의 역사 # 배고파하고 / 아파하는 환자 (샌드아트) 제대로 된 치료도 없이 배급도 받지 못하던 환자들의 상태는 날로 악화돼 일할 사람을 구하기 힘들 정도인 어느 날. - 소나무 옮기라고 명령하고 벽돌공장에서 작업에 방해되는 소나무 두 그루를 옮기라는 명령을 받은 25세의 젊은 한센인 이동(李東) - 다른 환자 업고 뛰고 이 명령을 잊고 같은 병사에 아픈 환자를 치료소로 데려간 것이 화근이 됐다. - 발길질당하고 일본인 간호주임인 사또 수간호장은 이동을 두고 “소나무만도 못한 생명”이라 욕하며 구두 발로 밟고 방망이질을 해 감금실에 가두었다. # 감금실 / 수술대 S.K 당시 한센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곳은 감금실. 작은 골방에 갇혀 금식이나 체벌을 받는 것은 물론 이 곳을 나올 때는 남녀를 불문하고 단종수술을 시켰다. 25살의 젊은이 이동도 수술대에 올랐다. “그 옛날 나의 사춘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 -25세 청년 이동(李東) - 수술실 S.K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단종수술을 강요받았던 한세인들에게 인간의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나 존엄성은 없었다. # 공원 만드는 사진 계속되는 핍박 속에 1939년 12월, 수호원장은 소록도 내 공원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환자들을 동원했다. 수톤이 넘는 돌을 맨손으로 옮기고 수백그루의 나무가 소록도로 공수됐다. - 현재 공원 s.k 아시아 각 지역에서 공수된 소나무와 향나무, 그리고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지금은 중앙공원은 한센인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눈물의 공원이었다. - 고통 받는 한센인들 공원이 완성될수록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한센인들의 병세는 악화되고 가혹한 매질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자살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 수호동상에 참배 자신의 동상까지 세우고 참배를 강요했던 수호원장은 결국 1942년 6월 20일 동상에 참배하는 보은감사일에 경북 성주 출신에 이춘상의 칼에 맞아 살해된다. 4.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핍박 # 해방 자료 1945년 주권을 되찾은 기쁨으로 온 나라가 들썩일 때도 한센인들의 수난의 역사는 계속됐다. - 1945년 8. 20일 : 환자 소요사건으로 한센인 84명 피살 - 1950년 9월 : 인민군에 의해 소록도 직원 11명 사살 - 1949년 9월 형무소 탈옥범으로 오인한 경찰들이 한센인 30여명 학살 - 1950년7월 관동교 부근에서 걸식하던 한센인 28명 군인에게 학살 - 1950년 8 경찰이 숨어있는 곳을 인민군에게 알려준 한센인 40여명 학살 - 1950년 여름 시내에 있던 한센인들을 굴속에 몰아넣고 폭탄을 터뜨려서 학살 - 1950년 10월 프락치로 의심받은 한센인 공산주의자 6명 인민군에게 학살 - 1957년 8월 식량을 구하기 위해 비토리섬을 개간하던 한센인 28명 주민들에게 학살 - 수탄장 s.k 소록도 역시 나아진 것이 없었다. 감독관만 바뀌었을 뿐 한센인들을 향한 멸시와 핍박은 여전했다. - 아이들 사진 감염구역과 미감구역으로 나눠 환자와 일반인들의 철저히 분리 수용했던 소록도.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는 없었다. - 수탄장 사진 한센인의 아이들은 감염을 우려해 따로 양육됐고 한 달에 한번 철조망을 사이에 둔 이 소나무숲에서 바람을 등지고 서서야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 아이들 사진 생떼 같은 자식을 눈앞에 두고도 안지 못하는 부모들의 탄식이 숲 안 가득해 사람들은 이곳을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다. 5. 사라진 희망, 오마도 간척공사 # 4.19 혁명, 5.16 군사 쿠데타 자료 4.19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격벽의 1960년대. 한센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 마리안느 수녀 봉사활동 시작 p.152 / 소록도 병원축구팀 마리안느 수녀와 마가렛 수녀가 소록도로 들어와 아이들과 환우들을 돌보기 시작했고 축구팀을 결성해 고흥군 대표로 출전하는 등 안정기에 접어든 이때, - 오마도 개간 신문기사 정부는 소록도의 한센인들에게 새로운 땅을 약속한다. 오마와도 오동도를 연결 둑을 쌓아 새로운 간척지를 만드는 한센인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분양하겠다는 것이다. “소록도 병원의 1천명 음성나병 환자가 10일부터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마도에 정착하여 스스로의 살아갈 터전을 닦게 되었다. ..... 2개년 계획으로 1천 1백정보의 간석지를 개간시켜 한 사람 앞에 1천2백 평씩 무상으로 나누어줄 예정이다. “ (경향신문. 1962.7.10) - 개간 공사에서 일하는 사진 바다를 막고 갯벌을 개간해 만든 땅은 소록도의 2배 크기로 한센인 1500세대가 2500여 톤의 곡식을 재배할 수 있는 규모였다. - 방조제 사진 인근 주민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전염력이 없는 음성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사라고 설득해 간신히 진행된 공사는 소록도 주민들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첫 걸음이었다. 문둥이가 / 문둥이들이 배에 돌을 실어서 / 바다에 돌을 던져서 풍양 곶과 오마도를 이어 / 도양 곳을 둑 쌓아서 바다와 / 바닷물을 밀어낸 바다 330만평 해면이 / 육지 330만평의 5만석 옥토가 된 이 간석지는 ...... 살아서 마지막으로 / 학대된 이름을 씻어 / 사람 구실하는 오 영광의 땅 / 햇빛 가득찬 오마의 땅이여/ 어둠에서 빛나는 햇빛이여 한하운 ‘오마도(五馬島)’ - 공사현장 사진 내가 살 땅을 내가 만든다는 마음으로 2500여명의 한센인이 투입된 공사. 하지만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방조제의 흙더미가 무너져 한명이 압사하고 6명이 부상하는 등 공사기간 내 40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 공사중단 신문기사 새로운 땅에 대한 기대도 잠시. 1964년 1500미터에 달하는 방조제는 200미터를 남겨두고 오마도 인근주민들의 반대와 예산부족으로 공사가 중지됐다. -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 s.k / 기념탑 결국 사업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가면서 소록도 주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 완공되었으나 모두 오마도 주민들에게 분양됐다. 보통 사람들처럼 살수 있다는 한센인들의 희망과 눈물이 담긴 오마도 간척지 공사는 결국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 중앙공원 s.k / 구라탑 ‘한센병은 낫는다. 지난 100년 동안 한센병은 알약 하나로 치료 가능한 병이 되었고 감염의 위험은 사라졌다. 전염력은 거의 없고 병흔만 남는 피부병, 한센병 천형이라는 오명 속에 숱한 시간을 편견과 차별 속에 살아온 한센인들.. 하지만 100년의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한센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그 간절한 소망에 이제는 답할 때이다. 사회적인 냉대와 몰이해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 승리의 모습을 보여 준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한센인의 역사적의미를 되새기고 인권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이다
한센인들의고향 소록도에서 희망을찾다
국립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영상 눈물의 땅, 소록도 100년- 2부작 1. 100년의 역사, 국립소록도병원 # 소록도 전경 헬리캠 소록도에 한센인들이 정착한지 100년, 억압과 핍박, 멸시와 천대, 단절의 땅이었던 소록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 소록대교 / 방문객들 지난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소록도는 이제 한해 **명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가 됐다. - 자료관 / 유물들 방문객들은 소록도의 아름다운 자연 뒤에 숨겨진 한센인들의 슬픈 역사를 공감하며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 출입금지 표시 하지만 여전히 소록도 뒤편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마을에는 한센병의 아픔을 겪은 소록도 주민들이 살고 있다. - 일하는 일상 한센병이 이미 완치됐지만 섬에 머물고 있는 한센인들은 570명. 2. 국내 유일의 한센병 전문병원 # 병원 건물 / 헬리캠 이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릴 수 있는 데는 국내유일의 한센병 전문병원인 <국립 소록도 병원> 이 있다. 소록도 100년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한센정책과 그 궤를 같이한다. - 병실 s.k 1916년 첫 문을 열어 올해로 개원 100년을 맞는 국립소록도 병원은 한센인의 치료, 요양 및 일상생활을 지원하고 있다. -각 과 소개 내과 외과 피부과 이비인후과, 정신과, 치과, 한방과는 물론 한센병을 앓고 난 이후 장애가 오기 쉬운 환자들을 위해 안과, 재활의학과 진료까지 가능하다. # 의료진 int q. 어떤 질병에 어떤 치료 이뤄지고 있는지? “한센병은 치료가 된 상태, 그 이후의 후유증에 관한 치료와 관리가 주된 치료다” - 진료 보고 섬에 있는 570여명의 환자들은 한센병은 완치됐지만 피부와 관절, 코, 눈까지가 침입한 나균은 완치 후에도 후유증 남긴 경우 많아 합병증을 치료가 주 치료다. - 간호사들 환자들과 이야기하고 환자들 연로해지면서 협심증, 당뇨병, 고혈압 등 노인성 질환도 많은데 이런 환자들 옆에서 의료진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손발이 되어준다. 3. 소록도를 지키는 사람들 # 치과 진료 오동찬 치과의사로서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20년간 국립소록도 병원을 지켜온 오동찬 의사. - 오동찬 int q. 언제 처음 소록도에 오게 됐는지? / 1995년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와 첫 인연. - 환자와 이야기 하고 20년이 넘게 국립소록도병원에 있었던 이유는 환자들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 - 오동찬 int q. 계속 근무하게 된 특별한 이유 있는지? / 봉사하는 삶 살고파서 가족들과 함께 들어와. - 간호사들도 일하고 오동찬 의사 뿐 아니라 간호사들 중에도 1,20년은 기본. 정년퇴직을 앞둔 강인숙, 장기호, 조서희 이경희 간호사 등도 꽃다운 청춘을 소록도의 환자들과 함께 해 오고 있다. - 간호사 int q. 얼마나 있었는지? 이렇게 오래 근무한 이유가 있다면? “25년. 소록도에서 환자들 돌보다 보니 정들어 한해 두해 미루던 게 여기까지 와” - 간호사들 예전 사진들 보고 흘러간 세월만큼이나 달라진 국립소록도병원의 풍경도 달라졌다. - 의지제작실 s.k / 일하는 김종군 장애가 있는 환자들을 위한 의구를 직접 제작해 만드는 일만 30년째 해오는 김종구씨는 아쉬운 점도 많아 - 김종군 int “돌아가신 분도 많고... 요즘에는 전동 휠체어 수리 해달라는 분이 많죠.” - 손잡이 달린 숟가락 등등 보조기구들 주인을 잃은 보조기구들을 보며 새삼 세월이 흐른 걸 알게 된다는 의료진들 - 과거 사진들 그간 의술은 발달하고 이제 한센병은 알약 복용만으로도 완치 가능한 병이 됐다. - 병원 s.k 하지만 완치가 되도 후유증과 합병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에게 의료지원은 꼭 필요하다. - 환자들 회진 돌고 4개 병동 160여명의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소록도 병원. 입원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은 병동에서 집중치료하고 있을 뿐 아니라 - 응급병동 s.k 3,5병동에 응급병동과 중환자실을 두어 응급상황에 대처하고 있다. - 상담하는 의료진들 또한 1993년 10월부터 국립소록도 병원 환자들에게 의료급여 혜택이 주어지면서 보건소 및 협력병원에 진료를 의뢰하는 등 의료서비스 확대는 물론 사회복귀를 위한 자활능력 배양에 힘쓰고 있다. 4. 함께 100년, 소록도 주민과 의료진들 # 간호사들 방문 진료 나가고 질환이 없는 400여명의 주민들은 소록도의 7개 마을에 흩어져 살고 간호사들이 날짜를 정해 방문 진료를 나간다. - 간호사 int q. 어느 마을로 가시는지? / 어떤 진료하시는지? - 자동차 타고 이동하고 / 집 앞까지 나와 있는 어르신 - 혈압 재고 / 주사 놓고 특별한 질병 없이 홀로 생활이 가능한 주민들이지만 말초신경을 주로 공격하는 나균의 특성상 손발이 불편하고 시신경이 망가져 앞이 보이지 않는 맹인들이 많아 매일 검진이 필요하다. - 벽에 병원 연락처와 이름 있고 그래서 소록도의 집 벽면에는 담당 간호사의 이름과 연락처가 크게 적혀 있다. - 주민 int q. 간호사들 어떤지? 자주 보러 오는지? - 자동차 다니고 간호사 말고도 마을 구석구석을 다니는 또 한 사람. -인사하고 병원건물과 400여 소록도 주민들의 전기를 담당하는 김진호씨 -전기등 갈아주고 연로한 환자들이 많은 소록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하루 20가구씩 돌면서 꺼진 등부터 고장 난 밥솥까지 못 고치는게 없는 소록도의 맥가이버다. - 김진호 int q. 주로 뭐 고치는지? / 어른신들이 좋아하시는지? 5. 나눔의 섬, 소록도 # 집안 둘러보고 / 집안일 하는 주민 완치 후 홀로 생활이 가능한 한센인들은 가족구성과 건강상태를 고려해 개인별 병사가 주어진다. 의식주를 국가에서 지원 받는다. - 수레 끌고 가는 주민 q. 어디 가시냐? / 소록도 장날이야. - 트럭 와서 식재료 나눠주고 일주일에 3번 각 마을 별로 식재료들이 제공되고 식재료 뿐 아니라 속옷과 의복까지 제공된다. - 우체국, 농협 있고 또 마을 안에 우체국과 농협, 주민센터까지 있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게 했다. - 라디오 듣는 주민 가장 큰 불편함이라면 외로움. 대부분 홀로 사는 고령의 노인이다 보니 홀로 보내는 시간이 가장 힘들다는데 - 자원 봉사자들 오고 그때 가장 큰 위안이 되는 이들은 소록도를 찾는 자원 봉사자들이다. - 자원봉사자 int q. 언제 어떻게 소록도 오게 됐는지? q. 꾸준히 찾게 된 이유가 뭔지? / 어르신들이 너무 다정하고 친절하고 봉사 활동하러 왔다가 오히려 저희가 받고 간다. - 봉사자들과 함께 밥 먹고 이야기 하고 감염의 위험이 있다고 섬에 갇힌 지 40년. 지난 세월 가족조차도 곁에 오려고 하지 않았지만 소록도에서만큼은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 6. 세상 밖으로 # 중앙 공원 / 관람객들 소록도 100년 핍박과 박해의 땅이 나눔과 위안의 섬으로 다시 태어난 데는 의료진과 한센병 환우들을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다. # 한센병 박물관 환자들의 휴식 공간을 위해 병원 본관 주위에 중앙공원을 조성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한센병에 관한 국민의 인식을 개선하고 과거 가난과 질별의 고난 속에 살아온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는 역사의 산교육장을 활용하기 위해 1996년에 한센병 생활자료관을 개관하여 그간 환자들이 투병생활중 사용했던 생활도구, 한센병과 관련 있는 도구, 자료, 사진, 책자 등을 수집 전시하고 있다. # 의료진들 환자 돌보고/ 식사 챙기는 자원봉사자들/ 방문 진료, 방문수리 s.k 육신의 고통 뿐 아니라 상처받은 영혼까지도 어루만졌던 국립소록도병원은 이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고 있다. - 의료진 환우들과 웃는 이미지 국립소록도병원은 한센인의 동반자로서 나눔과 배려로 한센인권 신장을 봉사와 실천으로 한센복지 향상을 치료와 간호로 한센건강 증진을 이루고 -고객 중심의 맞춤형 서비스 제공 특성화된 의료 환경의 조성 변화 발전하는 창조적인 가치 창출 한센인의 사회적 차별 해소와 한센병에 대한 인식제고 자연이 숨 쉬는 새활공간 조성 - 텍스트 c.g 국립소록도병원은 박애정신과 인권을 실천하는 곳으로 한센가족의 동반자로서 모든 한센인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 중앙공원 숲 s.k 그 옛날. 아픈 손과 발로 땅을 일궈 - 소록도 전경 f.s (헬리캠) 나무를 심고 아름다운 숲을 만들었던 한센인들은 생각했다. 이름도 태생도 다른 이 나무들이 한데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세상 밖 사람들과 한센인들도 언젠가 함께 어울려 사는 평등한 세상이 오기를. 소록도 100년 후, 의미 있는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국립소록도병원 새로운 변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소록도, 새로운 100년은 동행입니다.
[멘 트] 아픈 역사와 잘못된 편견에서 시작된 이야기 편견에서 벗어나 이젠 웃게 해주세요. 사랑이 살아 숨 쉬는 행복의 요람 소록도의 새로운 100년은 동행입니다. [자 막] 이곳은 눈물의 섬 소록도 입니다. 면회를 와도 손 한번 못 잡아보고 괄시, 멸시, 천대 이건 말로 표현 못해요. 한센인이 100년 만의 외출에 나섭니다. 박형철 국립소록도병원장 역사와 인권의 섬 소록도에서 한센인의 건강과 복지, 행복을 위한 동행의 국립소록도병원이 되겠습니다. 한센인의 행복의 요람 소록도의 새로운 100년은 [동행]입니다. 2016년 5월 17일 개원 100주년 국립소록도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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