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비 1180px 이상
너비 768px - 1179px
너비 767px 이하

6월 소록도 이야기_동생리 선창

  • 등록자 :백미영
  • 담당부서 :운영지원팀
  • 전화번호 :061-840-0694
  • 등록일 :2021-09-29

소록도이야기_동생리선창001 하단참고

동생리 선창

<소록도의 연안沿岸은 주위 대부분이 멀리까지 수심이 얕아 선박의 입항이 매우 불리하 여, 어선 정도를 제외하고는 멀리 정박하는 상태로 건설공사에 필요한 각종 자재를 비롯하 여 환자 식량, 땔감, 기타 물자를 배에서 육지로 운반하는데 매우 불편을 격을 뿐만 아니라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해결할 완전한 잔교棧橋를 축조하고자 장소에 관하여 상세한 조사를 벌인 결과, 다행히 소록도 내 병사지대病舍地帶 동생리와 남생리의 중간에 가장 적합한 암각岩角을 발견하였기에 노동이 가능한 환자를 총동원하여 직원의 지도 아래 1939년 6월 12일 기공하였다. 그러나 본공사는 잔교와 이에 부수한 호안護岸 겸 도로까지 포함하여 그 연장이 330여 간間으로 그 중 잔교 부위는 바다쪽으로 돌출하여 조류의 흐름 이 빠르고 특히 태풍이 있을 때에는 소용돌이 치는 물결이 실로 격심하다. 그 부분의 공사 는 특히 견고를 요하므로 대형석재를 이용하고, 수중을 매울 부분은 가장 거대한 돌(1톤~3 톤)을 이용하였다.

동생리 선창공사 작업

면적 약 500평, 높이 평균 4.5m의 하역장은 전혀 토사를 이용하지 않고 암석만을 이용하 였기로 이 석재 총량은 1,700㎥에 달한다. 암석 운반을 시작하여 축조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기계류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경험없는 환자의 손으로만 이루어졌으며 착공 이래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강행한 불면不眠, 불휴不休의 노력을 계속하여 겨우 120일이란 단시일

소록도이야기_동생리선창002 하단참고

을 갖고 완성하였는바 혹시라도 이 공사를 민간청부로 하였더라면 거액의 경비와 장기간을 요했을 것이 명확한 일로 이 공사는 당원 건설사업 개시 이래 특필할 만한 대공사로서 특히 환자의 노력봉사에 의하여 완성했다는 점에서 가장 의의가 깊다 할 것이다. ※ 120일간 환 자출역 연인원 96,583명>, 1939년 소록도갱생원 연보, 11~12쪽.

1939년 동생리 선창 낙성식

동생리 선창은 소록도 전역을 자혜의원 부지로 매수한 1933년 이후 진행된 확장공 사의 마지막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렇게 소록도 최대 토목공사는 순전히 환자들의 노 동력만으로 놀랄만큼 짧은 기간에 완성되었다. 조선나예방협회와 스오 마사스에 원장은 확장공사를 구상하면서 비용절감을 위한 몇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첫째 요양소의 건축양식은 요양상 편리하고 장래에 수리비가 필요치 않은 내구력이 있는 자재를 사용할 것, 둘째 특수한 공사 이외에는 환자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공사비를 절감할 것, 셋째 공사비 절감 방법으로 도내의 원토와 모래를 이용하여 벽돌을 제조할 것 등이다.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센 연안에 500평 규모의 하역장을 건설하는 것이 특수한 공사가 아닐까? 공사기간에 동원된 연인원을 볼 때 하루 평균 804명이 출역을 했다. 연보 기록에서도 보이듯 이 인원들은 규칙적인 시간에 동원된 것이 아니라 불면不眠과

소록도이야기_동생리선창003 하단참고

불휴不休의 고통을 감내하며 맨손으로 공사현장에 내몰렸다. 달의 움직임에 따라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고, 물이 빠지는 썰물 시간에 맞춰 한밤중에도, 이른 새벽에도 불을 밝혀가며 일을 했다고 한다.

동생리 식량하역 및 운반(1942. 5.)/동생리 선창에서 바라본 호안도로(2021. 9.)

동생리 선창에 서서 호안도로를 바라보면 1톤에서 3톤 무게의 석재를 옮기는데 어떠한 기계류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그것도 아픈 환자들의 힘으 로만 이루어진 역사役事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동생리 선창 공사는 거액의 공사비와 장기간의 공사기간을 아꼈을지 모르나 당시 공사에 내몰린 환자들의 고통 과 아픔을 낭비한 무리한 역사役事였음을 잊지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