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비 1180px 이상
너비 768px - 1179px
너비 767px 이하

3월 소록도 이야기_자혜의원

  • 등록자 :백미영
  • 담당부서 :운영지원팀
  • 전화번호 :061-840-0692
  • 등록일 :2021-04-02

소록도 이야기-자혜의원001

소록도 자혜의원

자혜의원(慈惠醫院)은 대한제국 1909년(융희 3) 지방에 설치된 근대의료기관이다. 이것 은 제중원(濟衆院, 1885), 대한의원(大韓醫院, 1907)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국립 근 대의료기관이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사실상의 식민지 통치를 시작한다. 일제는 조선의 군사 및 경찰행정을 먼저 장악하고, 이어 의료와 보건부문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의료 부문에서 통감부는 1907년 대한의원을 설립하였고, 이를 정점으로 1909년부터 각 도의 중심지에 당시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 주도하에 자혜의원을 설립하여 식민지 의료를 구축해 나간다.   자혜의원 설립은 의병운동을 진압하여 전투가 줄어들자 많은 군의(軍醫)가 불필요해졌고, 이들 군의를 ‘구료를 통한 민심융화’, 각 지방 식민지 통치자 구료를 동시에 실현하고자 설립하였다. 일제는 대한의원을 설립하여 한국의 국가의료, 의학교육, 위생행정 사무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국 13도에 자혜의원을 설립하여 의병운동을 진압한 후 불필요한 군의문제를 해결하였다. 강제·폭압적인 경찰, 헌병이 서양의료로 ‘조선 궁민(窮民)을 구료한다’ 는 인식을 심어 주고자 하였다. 이는 보건의료

소록도 이야기-자혜의원002

측면과 일본의 식민지 정책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신동원, 1997, 『한국근대보건의료사』, 363~365쪽). 소록도자혜의원은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설립된다. 이것은 1909년 12월 전주와 청주에 설립되기 시작한 자혜의원이 이후 수원, 공주, 청주, 대구, 평양 등 지방 도시에 개설된 이후 19번째 자혜의원으로 한센병환자만을 위한 병원으로 설립된다. 조선총독부는 나요양소의 부지로 환자를 ‘격리’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고, 남해안의 도서를 순회하면서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소록도 서남단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소록도의 온난한 기후와 자연조건에 주목하였고 여기에서 난방비 절감과 풍부한 해산물 수급 등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측면과 일본의 식민지 정책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신동원, 1997, 『한국근대보건의료사』, 363~365쪽). 소록도자혜의원은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설립된다. 이것은 1909년 12월 전주와 청주에 설립되기 시작한 자혜의원이 이후 수원, 공주, 청주, 대구, 평양 등 지방 도시에 개설된 이후 19번째 자혜의원으로 한센병환자만을 위한 병원으로 설립된다. 조선총독부는 나요양소의 부지로 환자를 ‘격리’하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았고, 남해안의 도서를 순회하면서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최종적으로 소록도 서남단을 선정하였던 것이다. 소록도의 온난한 기후와 자연조건에 주목하였고 여기에서 난방비 절감과 풍부한 해산물 수급 등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1916년 7월, 자혜의원 초대원장에 부임한 아리카와는 부임과 동시에 기존 마을의 가옥들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시설들의 건축공사에 착수하였다. 소록도자혜의원의 병원건물은 1917년 2월 준공되었고 1917년 초에 본관 1동을 비롯하여 진료소, 예배당, 병사, 목욕장 각 1동과 주임관사, 간호초소, 취사장 등

소록도 이야기-자혜의원003

50여동이 건평 477평으로 건축되었다. 신축된 건물은 북쪽 해안 쪽에 관사, 그 아래쪽으로 사무실, 진료소, 부속시설, 병사(病舍)가 순차적으로 위치하였다. 사무실과 진료소 사이에, 그리고 외부 마을과 자혜병원 사이에는 철조망으로 구획되어 있었다. 설립 당시 병원설계도를 보면, 모든 건물들은 단순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무실은 누름대 비늘판벽으로 마감된 서양풍 단층 목조건물로 설계되었으며, 내부에는 원장실, 사무실, 건강인진료실 (健康者診療室), 약국제제실 (藥局製劑室)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진료소의 설계도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소록도자혜의원 건물은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록도자혜의원 환자수용시설은 부부병사, 남녀 병사, 전염병사로 구분되었고, 직원거주공간을 무독지대, 환자거주공간을 유독지대로 나누어 불렀으며, 그 사이를 차단하였다. 초기 병사생활은 다다미방에서 한복은 입을 수 없었고 일본식 생활양식이 강제되었다. 1917년 5월 17일 개원식을 거행하고 최초의 수용환자는 ‘노상이나 시장 등에서 배회하는 병독전파의 우려가 있는 자’들이었고, 수용방식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제적인 것이었다. 당시 소록도자혜의원은 규모의 측면에서 선교 나요양소들에 비하여 훨씬 작고, 환자에 대한 치료보다는 부랑환자의 단속과 수용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더구나 중증환자들이 수용되었으므로,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소록도자혜의원은 조선의 한센병환자의 구제보다는 식민지의료와 문명국 일본을 자랑하고 국외적인 체면유지와 식민지배 정당성 확보를 위한 형식적 한센병요양소 개설이라 볼 수 있다. 1917년 자혜의원 설립 초에는 100명의 수용정원으로 전체 환자의 극히 일부인 90명이 수용되었다. 100명의 수용정원은 1923년까지 변화 없이 지속되다가 1924년에 이르러 125명으로 증원되었고, 1925년에는 250명으로 증원하였다. 소록도자혜의원의 제1차 확장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1928년에는 수용정원이 450명으로 늘어났고, 이듬해인 1929년에는 750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소록도자혜의원의 수용환자는 여수를 제외한 부산이나 대구의 요양소보다 더 많은 환자를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록도 이야기-자혜의원004

이처럼 점점 늘어나는 환자수용과 일본 나정책의 전환점인 절대격리정책의 영향은 소록도에까지 미쳐 1934년 10월 1일 이제까지 도립 소록도자혜의원에서 조선총독부가 관리하는 국립요양소로서의 소록도갱생원으로 명칭이 바뀐다.